작성일 : 16-10-12 11:05
리스트
이 유 개인전_ SAESAE- Channel & Odyssey
 글쓴이 : 최고관리자
프린트 조회 : 282  

◇ 전시 개요

전시제목 ㅣ SAESAE- Channel & Odyssey
참여작가 ㅣ 이 유
전시일정 ㅣ 2016. 10. 12 wed - 10. 18 tue 
전시장소 ㅣ 관훈갤러리 3F
관람시간 ㅣ 10:30 ~ 18:30



◇ 전시 서문
 


< 정신의 추적자 >

보이는 실재 이외의 것을 일체 거들 떠 보려고 하지 않는 세태속에서 의식의 심연을 관찰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과학을 신봉하는 자연주의자들에게는 혈압을 상승시키는 행위로, 유물론자들에게는 미신적 행위로 비칠 것이 분명하지만 인간은 물질로만 해명할 수 없는 측면을 갖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과연 인간은 ‘물질의 신화’밖에 없는 존재일까? 미술의 역사는 이런 사실을 부정한다. 옛 사람들은 예술을 영혼의 거울로 보았는데 이것은 예술작품에 마음을 투영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재에 다가갈 수 있는 특별한 인간정신의 능력이 없다면, 예술은 말단적인 차원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예술은 의식이 보다 깊은 곳을 파고들어 인간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지성인들이 예술을 과학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파악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이 정신적 존재인 한 예술 또한 정신성을 지닌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작가 이 유의 작업은 인간은 정신성을 띠며, 그 때문에 여러 복잡 미묘한 양상, 때로는 예측 불가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의 작품에는 모종의 기호들이 군집해있다. 그것은 세상에 없는 이미지들로 작가 이 유가 창의적으로 개발해낸 형태들이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무슨 필연성이 개입되어있는지 매우 궁금하다. 기하학적 패턴들은 그가 ‘비밀의 문’ 속에서 체험한, 즉 의식내부에서 일어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화폭에 담은 것이다. 작가는 매우 진지하게 자신의 경험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 속 같은 깊은 어둠속을 향해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듯 휘말려 들어가고 있었다...그것은 마치 카세트테이프처럼 얇은 포장 끈 같은 것이 어둠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다 그 끄트머리가 실패에 말려 안으로 뚝하니 끊어지듯 튕기며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밤하늘에 폭죽이 터지듯 하얀  빛이 물결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듯이 안 밖의 공간을 하얗게 뒤덮었다.”(작가노트중에서)

이것은 그에게 일어난, 1999년 어느 따듯한 봄날의 사건을 기술한 것이다. 각 화면에 펼쳐져 있는 서로 다른 다이어그램은 그가 경험했던 신비로운 일들을 순서대로 묘출한 것이다. 작가는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놀라움도 컸지만 이로 인해 삶의 전기를 맞았고, 그 여파로 한때는 명상 훈련에 매진하다가 몇 년 전부터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SAESAE- Odyssay 1601>과 <SAESAE- Odyssay 1602>는 이번 전시의 중핵이자 요지를 압축한 작품이다. 둥근 원은 몇 개의 레이어로 에워 쌓여 있으며 그안은 다시 지구의 내핵처럼 겹겹이 십여개의 지층에 둘러쌓여 있다. 직진성의 레이저가 나오듯 핵(核)에서 발산하는 환한 빛을 바깥으로 확산하는 모양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서양의 색면회화처럼 평면성이나 색 자체의 고유성을 증명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을 도형화한 것이기 때문에 각각의 조형은 기의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일반 추상과 구분되며 초월주의적 사유와 통찰에 의해 제작된 것이라는 점을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다시 원 그림으로 돌아가면, 그림은 왼쪽부터 시작되어 오른쪽에서 끝나는데 맨 왼쪽의 검은 색은 망아(忘我)의 상태를, 그리고 얇은 푸른 색띠(colour-bar)는 의식이 깨어남을, 화면중심은 흰 빛의 발산, 입자의 공간, 어느 한 입자가 반짝임, 입자의 주시 등으로 나누어진다.
다음으로, <SAESAE- Channel> 시리즈는 다양한 의식, 마음의 상태와 다층의 시공간을 연결하는 통로로서 대상과 마주하는 매개물을 표시한다. 중앙의 두 개의 원은 안팎의 대상을 향해 일어났다 사라지는 심리상태를, 그 위와 아래의 원은 수동성과 능동성, 두 개의 사각형은 심안과 육안을 각각 상징한다. 화면 한 복판의 길쭉한 타원형은 연속과 불연속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순환하는 기억의 사이클을 각각 상징한다. 작가는 일견 유클리트적 기하학을 추구하고 있는 것같지만 실제로는 사각형과 원형, 그리고 타원형을 통해 인간의 의식에서 전개되는 양상들을 기호화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채널이 내부의 상태에 응답하는 외부세계를 맞이하는 장소나 통로로서 또는 외부의 자극을 내부로 전해주는 매개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몸과 의식을 마치 음향판처럼 외부의 자극을 수신하는 채널로 인식한다는 것을 뜻한다. 몸은 감각의 무늬들을 매개한다면 의식은 심리의 물결들을 매개한다. 심안과 육안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심안’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통로가 되며, ‘육안’은 보이는 세계의 통로가 된다. 물질과 정신의 세계를 이원론적이 아닌 일원론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그가 실재의 인식에 어느 극단으로 치우침 없이 일종의 균형감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가 하면 작가는 이번 개인전에 <SAESAE - Odyssay D 1601>과 <SAESAE -  Odyssay D 1602>를 출품한다. 채널 시리즈가 의식세계의 복잡한 양상을 기호화한 것이라면,오딧세이 연작은 입자들이 밀도의 차이로 펼쳐진 공간과 성벽처럼 세워진 입자의 물결을 표현한 것이다. 작가는 “바다의 표면이 거대한 성벽처럼 직각으로 일어서서 물결치듯 전면에서 일렁이다가 --- 어느새 뒤로 기울어진 벽처럼 비스듬히 눕듯이 밀려나고”라고 설명하였다. 이런 작가의 언급이 실제적인 것인지 환상적인 것인지 구별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체험한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며, 이것을 예술의 화두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에게 이것은 더없이 삶의 확고한 증표요 예술의 기준점이 되고 있다.
작가는 그의 심상세계에서 일어난 것들을 탐사하면서 마음의 작용이야말로 인간에게 있어 가장 신비로운 지점이라고 여기는 것같다. 말하자면 작업은 자신의 내부와 외부에서 일어났던 현상의 역추적이자 재구성인 셈이다. 비유컨대 마음은 ‘인체의 지휘소’이다. 누구도 ‘인체의 지휘소’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인체의 지휘소’에 대한 소중함을 통감하게 해준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l)은 “자유인의 예배”(A Free Man's Worship)에서 “인간은 그 나중이 어떻게 될지 예견할 수 없는 원인들로 만들어진 ‘제품’이다”고 했다. 러셀에게 ‘인체의 지휘소’는 ‘원자들의 우연한 배치에 의한 결과물’이었다. 따라서 거기에 어떤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불신의 도그마에 사로잡인 그로서는 수치였다. 이런 기계론적인 관점이 인간을 구성하는 시대에 ‘마음’을 출발점으로 삼는 예술이 희박한 것은 사필귀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물질을 삶의 기반으로 삼는다면 물질이 사라지는 순간 인생도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 절망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해독제를 발견할 수 없다는 데에 심각성이 있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이 유가 추구하는 예술세계가 주목된다. 그에게 마음의 세계는 흥미진진하기만 하다. 마음의 기관에서 일어나는 세목을 일일이 기록한다는 자체가 나의 존재, 나아가 인간의 신비성을 거듭해서 확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끝 간 데 없는 마음의 세계를 통해 우리는 인간 존재의 미스터리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다.


서성록(안동대 미술학과 교수)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6-10-12 11:05:51 UPCOMING에서 이동 됨]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6-10-20 14:51:03 CURRENT에서 이동 됨]
  게시글 주소 : http://kwanhoongallery.com/bbs/board.php?bo_table=gal_04& wr_id=122
위 자료는 저작자나 게시자의 동의없이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이전  다음 
리스트
 

▒▒ KWANHOON GALLE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