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전시 Current Exhibition

mystic scenery
천눈이
mystic scenery
장소
관훈갤러리 전관
날짜
2013.03.06 ~ 2013.03.24

기호들의 놀이터


이선영(미술평론가)

mystic scenery’라는 부제로 열린 천눈이의 작품 속 기호는 그것과 연결된 의미는 물론, 지시(참조)대상과도 거리가 있다. 작가는 그것을 ‘비정규적 기호들’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일상적 소통에 전제되어 있는 사회적 약정과는 거리가 있지만, 여전히 기호이긴 하다. 그것은 무의미하거나 추상적인 기호라기보다는 불확정적 기호인 셈이다. 기호란 약정이기 때문에 변화될 수 있고, 예술이란 이러한 변화를 위한 무대 또는 실험실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비정규적’ 이란 그 또래의 젊은이들에게 보편적으로 내면화된 현실, 즉 확실히 정해진바 없이 불안하게 떠다니는 사회적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확정된 현실과는 놀 수 없기에, 작가는 기호들을 비정규적으로 만든다. 기왕에 닥친 슬픈 현실을 놀이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기호들이 ‘비정규적’인데다가 ‘놀이’까지 하는 화면은 시종일관 애매하다. 그러나 작가는 비정규적인 기호의 놀이가 연출하는 모호함을 통해, 사이비 구체성이 지배하는 현실로부터 해방의 계기를 마련하려한다.

화면 안에 간간이 섞인 미소한 분량의 재현적 요소는 의미나 대상으로부터 자율화되어 떠다니는 기호들을 엮어서 나름의 인과관계와 이야기를 만들어 내려는 작가에게만 확실할 어떤 단초일 뿐이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징적 구조와 언어는 개인의 문법과 서사로 변화되었다. 비정규적 기호들이 놀이하는 장은 비현실적 풍경을 이룬다. 명확히 알아볼 수 없고 읽을 수 없지만, 천눈이의 풍경이 어떤 프레임 안에 들어온 사건의 세계임은 분명하다. 사건은 이질적 요소들이 예측할 수 없는 선을 따라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진다. 들뢰즈는 바로크 시대의 한 세계관을 연구한 저서 [주름]에서 사건은 흐름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에서 영원한 대상들은 사건 안으로 이입하며, 영원성은 창조성과 대립되지 않는다. 천눈이의 작품에서 사건은 사실적이 아니라, 상상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 현실에서 아무것도 아닌 일이 여기에서는 거대한 사건일 수 있고, 그 역도 가능하다. 자유로운 기호들이 이어지는 풍경은 매우 역동적이다. 대조적인 명암과 색상, 여러 층이 겹쳐진 주름진 공간은 바로크적이다.

통상적인 인과율과는 무관한 기호들 간의 불연속적 연결, 이 역설은 휘몰아치고 폭발하고, 흘러내리며 튕겨지고, 통통 튀며 도약하는 기호들로 이루어진다. 이 기호들의 놀이터에는 움직임만이 영원하다. 검정과 빨강 계열로 공포와 암울한 느낌을 주었던 이전의 작품은 회색 계열을 거쳐, 흰색이 많이 들어간 화사한 화면으로 변모했다. 요즘 그림은 밝고 날렵하고 가볍다. 현실의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이 대안의 세계는 빛이 가득하다. 어두운 공간에 성운성단처럼 흩뿌려진 하얀 얼룩들은 밝게 빛난다. 이 빛은 자연이 아닌 내부로부터 자체 발광한다. 빛은 입자나 파동이 되어 화면 곳곳에서 명멸한다. 먼지처럼 떠다니는 입자들을 빛을 가득 담고 중력마저 모호한 희박한 공간 속에서 밀도를 만들어낸다. 밀도는 잠재적인 움직임과 속도를 예시한다. 그것들은 어떤 힘에 의한 폭발이나 파열 같은 막 발생한 사건의 흔적들이다. 기호들은 무엇으로 변할지 모르는 미지의 것이라는 점에서 현실적이 아니라 잠재적이다. ‘가공되어지지 않고, 정의되어지지 않은 날것의 형상들은 태초의 생명성을 지니지만, 인식의 기억을 빗겨나가기만 한다’(작가노트)고 말하는 천눈이의 그림은 견고함으로의 고착을 거부하는 유동적 과정만이 일관된다.
기호들의 이어짐이 만드는 사건의 세계는 재현의 세계로부터 탈주 선을 생성한다. 그것은 작가가 고정된 현실로부터 벗어나 상상하고 추구하는 풍경인 것이다. 이 대안의 세계(그림)가 작가에게는 더욱 현실적이다. 굳이 ‘기호’나 ‘풍경’이라는 재현적 요소를 차용하는 이유는, 비현실적으로 보일지 모르는 이 대안의 세계가 가지는 현실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예술은 단지 현실 도피라는 부정적 요소만으로 서 있기 힘들다. 예술이 지속가능한 대안의 세계를 이룰 수 있으려면, 강한 긍정성, 요컨대 작가가 거기에 들어가 살 수 있는 또 하나의 자족적 생태계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비록 그 대안의 세계를 제대로 구축하고 그 내부로 진입하기 힘들지라도 말이다. 진입의 장벽은 높고도 두텁지만, 변신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작업에만 전적으로 몰두하는 이에게는 이러한 차원 간의 왕래가 어렵지 않을 것이라 본다. 작가는 스스로 구축한 대안의 세계 안팎으로 들락거릴 수 있으며, 이 잠재적 시공간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천눈이의 그림은 작업실 안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방이며, 전시라는 행위를 통해서 이 내밀한 방의 문은 살짝 열린다. 기호들과 놀이할 수 있는 관객에게 이 방은 더 활짝 열려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이질적 공간을 온전히 통과하기는 힘들다. 다른 차원이기에, 다른 차원으로 변형되어야 왕래할 수 있는 이 대안의 세계를 ‘보금자리’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작가의 현실인식은 다소간 비극적이다. 비극적 세계관은 ‘보금자리’라고 말해지는 환상의 세계에도 반영된다. 그것은 중력에 반응하여 화면에 줄줄 흘러내리는 액체적 요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상상의 몫이 커질수록 현실은 피상적이다. 내면은 적대적 외부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해방구가 된다. 이러한 부류의 작가에게 작업이란 현실을 이루는 여러 요소 중의 하나이기를 그치고, 그자체가 실존적 삶터가 된다. 여기에서 현실과 대조되는 환상은 희망이나 구원의 차원으로까지 격상될 수 있다. 캐스린 흄은 [환상과 미메시스]에서 환상을 사실적이고 정상적인 것들이 갖는 제약에 대한 의도적인 일탈이라고 생각한다. 환상이 주는 만족감은 일탈, 즉 현실적인 사항을 결정하거나 목적 있는 행동을 추구해야 하는 책임이 없다는 생각에서 온다.
로즈마리 잭슨도 [환상성]에서 환상예술은 잠시 동안 무질서와 무법을 향해, 법과 지배적 가치체계의 바깥에 놓여있는 것을 향해 열려있다고 본다. 잭슨에 의하면 언급되지도 않던 문화, 보이지도 않던 문화를 추적하는 환상은 현실의 범주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불가능, 비사실, 무명, 무정형, 미지, 비가시 등 19세기 리얼리즘의 범주에서는 오직 부정적인 용어로만 개념화할 수 있던 영역을 소개한다. 천눈이에게 환상세계는 기호들의 놀이터이기도 하다. 퍼스의 [기호론]에 의하면, ‘첫 번째 것과 두 번째 것 사이에 관계를 맺어주는 제 3의 어떤 것, 기호는 바로 이 세 번째 것에 해당’한다. 기호의 근본적 기능이 상관관계가 없는 관계에 상관성을 부여하는데 있다는 점에서, ‘비정규적 기호’는 동어반복적인 표현일 뿐이다. 한쪽에 대상이, 다른 한쪽에 그에 상응하는 해석 내용이 있는 것은 사회의 규칙이자 습관일 뿐, 자연의 법칙은 아니다. 현대에 와서 기호의 자의성이 더욱 강하게 의식되었다. 천눈이는 의미와 대상으로부터 해방된 언어로 놀이한다.

작가는 상실이자 무법천지일 수도 있는 이 자율의 공간에서 놀이함으로서 자유의 공간으로 도약하려 한다. 놀이를 통한 신선한 조합은 새로운 의미와 대상을 파생시킬 수 있다. 그것이 대안적 현실을 구성한다. 예술 역시 또 다른 상징적인 세계들을 창조한다는 면에서 놀이와 유사하다. 예술은 ‘무엇인가를 반드시 의미해야 하는 것으로부터의 도피와 해방의 한 형식으로의 놀이’(퍼트리샤 워)를 강조한다. ‘모방적(mimetic) 구성과 대립되는 기호적(semiotic) 구성’(바르트)으로 이루어진 천눈이의 작품은 놀이에 더욱 적합하다. 놀이는 일상의 문맥을 재문맥화 함으로서 기존의 의미를 갱신하고 새로운 의미를 활성화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를 생성하려 한다. 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재현의 보수적 질서와 창조적 무질서를 구별한다. 그에 의하면 재현은 단 하나의 중심만을 지닌다. 반면 운동은 다원적인 중심들을 함축한다. 거기에는 포개지는 원근법들, 뒤얽히는 관점들, 재현을 본질적으로 기형화시키면서 공존하는 계기들이 함축되어 있다.
기호의 놀이라는 열린 운동은 유한한 재현이 아니라, 무한한 생성을 향한다. 천눈이는 잠재적 현실을 강조한다. 그것은 단지 허구나 환상이 아니라,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는 것이다. [차이와 반복]에 의하면 예술작품은 어떤 잠재성 안에 잠겨있는데. 예술작품은 자신의 발생적인 미분적 요소들, 잠재화된 요소들, 배아적 요소들을 통해 형성되는 어떤 구조, 완결적으로 규정된 구조를 끌어들인다. 구조는 잠재적인 것의 실재성이다. 잠재적인 것 안의 차이와 반복은 현실화의 운동, 창조로서의 분화의 운동을 근거 짓는다. 들뢰즈는 라캉을 인용하며, 현실원칙의 지배 아래 있는 현실적 대상들은 어느 곳에 있거나 어디에도 없다는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한다. 반면 잠재적 대상은 자신이 있는 곳, 자신이 향하는 곳에 있으면서 있지 않는 속성을 지닌다. 잠재적 대상의 본질적 특성은 잃어버린 대상이라는 데 있다. 멜라니 클라인에 따르면, 엄마의 몸 안에는 수많은 잠재적 대상들이 포함한다. 몸을 연상시키는 잠재적 대상들이 가득한 천눈이의 작품은 여성적이다. 여기에서 여성은 반쪽의 성으로 환원된 고정된 주체가 아니라, 모성처럼 ‘과정중의 주체’(크리스테바)가 된다.

잠재적인 것은 단지 허구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대상을 구성하는 어떤 엄정한 부분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들뢰즈가 강조하는 것은 잠재적인 것이 실재적인 것과 대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다만 현실적인 것에 대립할 뿐이다. 잠재적인 것은 그자체로 어떤 충만한 실재성을 소유한다. 마치 동물의 배(embryo)가 발생하듯이 식물이 싹을 틔우듯이 분화를 통해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된다. 그러나 천눈이의 작품은 이러한 유기적 비유도 넘어선다. 작품 [로맨틱한 기계]에서 보여지듯, 거기에서는 기계(machine)와의 이질적 접속 또한 빈번하다. 그녀가 그리는 세계는 잠재성이 현실성으로, 현실성이 잠재성으로 변화한다. 현실화와 분화는 창조이다. 동일성에 기반 하는 재현의 세계는 차이에 기반 하는 생성의 세계로 변모한다. 미세하게 또는 힘차게 소용돌이치는 화면은 발생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러한 영겁의 회귀의 과정 속에서 새로운 표현이 샘솟는다. 희박하거나 응축된 상태로부터 우발적으로 솟아오르는 에너지는 화면에 활기를 부여한다. 이 빠르고 강한 힘은 정해진 궤적으로부터의 일탈을 낳고, 새로운 궤적을 산출한다. 그것이 천눈이가 그녀를 자유롭게 할 새로운 영토로 탈주하는 방식이다.

  

 

 

 

실험실, oil on canvas, 112×162cm, 2012

 


 

기호들의 순환, 173×73cm, oil on canvas, 2013

 

 



수집된 것들, 180×230cm, oil on canvas,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