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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의 언어: 존재의 환영에서 '그것'으로
이정동
과정의 언어: 존재의 환영에서 '그것'으로
장소
관훈갤러리 전관
날짜
2018.08.29 ~ 2018.09.15

작가 이정동은 2016년 관훈에서 <반투명한 서술>展으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고,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는 압도적 이미지로 미술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은 데 이어, 관훈에서 다시 2년 만에 새로운 작품으로 개인전을 펼친다. 전시 준비기간은 2년이지만, 특유의 작업의 진행 절차와 고강도의 노동과 긴 시간을 요하는 작업 방식, 대형 설치 작품의 준비기간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4년이라는 시간의 공력이 쌓인 전시다. 이번 전시는 지난 전시까지 남아있던 형상의 흔적과 존재의 환영이 약화하거나 지워진 대신 오롯이‘과정’의 언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결과물을 창출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이 과정의 언어는 두 측면과 방향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하나는 ‘과정’ 개념과 그와 관련된 아이디어의 측면, 다른 하나는 제작의 과정, 이미지 자체의 문법, 이미지의 지각과 해석의 경험 등, 모든 측면에서 그의 아이디어를 필요충분하게 반영하고 있는 조형 언어의 측면이다. 이정동은 이 두 측면에서 ‘과정’의 존재 방식과 언어를 훌륭하게 빚어내고 있다. 그 결과 이번 전시는 이미지의 스펙터클, 지각적 충격, ‘존재’에 대한 환영의 효과는 완화된 반면 그의 언어에서‘과정’개념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보다 분명히 성취되고 있다.


작가 이정동은 작업을 준비했던 2년 여 간의 시간 동안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과 그에 따른 언어의 변화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이미 말하고 있다. “현실과 가상의 시공간을 수없이 오가며 작업하는 몰입의 시간은 둘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이때 모든 가능성은 열리고 그 형상의 꾸밈은 사라진다.(작가노트, 2018)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면, 이번 전시에서 형상과 환영의 측면이 약화된 것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형상의 필요성이 자연히 사라진 탓이다. 왜 현실과 가상의 경계 해체가 형상이나 환영의 부재로 이어지는 것일까? 이 문제에 답하는 것이 이번 전시를 읽어내는 키가 될 것이다. 해에 도달하려면 이정동의 작업이 시작된 연원을 추적해 올라가고 직접 그 수행의 방식을 고찰하면서 거기서 환영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찾아보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이정동의 작업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결과물보다 그 수행의 방식과 절차 안에서 찾아지니 말이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주로 인터넷 등의 가상공간을 비롯해 현실에서 취한 다양한 이미지를 수집하고 이를 컴퓨터 프로그램에 내장된 알고리즘에 따라 변형한다. 원 이미지들은 컴퓨터가 처리하고 저장할 수 있는 최대치의 레이어들로 분해되고, 이미지의 변형이 기록된 각각의 레이어들은 특유의 조합의 문법을 통해 재조합, 재구성의 과정을 거쳐 종합된다. 변형된 이미지의 집합적 종합은 일정한 문법에 따라 재구성되면서도 그 최종 승인의 지점은 언제나 환영이 출연하는지의 여부였다. 다시 말해, 그가 투명한 비닐 위 펜 드로잉으로 옮기기 전 이미지는 하나의 환영을 동반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때 그 환영은 변형의 정도에 따라 원 사물의 이미지가 무엇이었는지 알아볼 수 있는 정도에서 이미지의 개별성과 구체성은 사라지고 단지 어떤 인간, , 어떤 다리 정도임을 알아볼 수 있는 단계까지 그 층위가 다양했다.


이정동이 직접 술회하는 것처럼, 컴퓨터 알고리즘이 수행하는 변형은 “사물의 형상을 하나의 이미지로 각인시키는 걸 벗어나 나무의 뿌리처럼 여러 갈래로 갈라져 해석되어지게 도와주며,”결국 “사물의 형상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 안에서 자유로워진다”(작가노트, 2018) 다음은 더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다. “디지털 시대에 존재하는 그 어떤 본질도 현실공간 속에서 한 순간에 포착된 이미지나 형상으로 설명하기 어려우며 디지털 가상공간에서 타인과 교감하는 무수한 순간들에 의해 그 본질은 변화한다.(작가노트, 2018) 이 대목은 한편으로는 이정동의 2년 전 작업의 정체도, 동시에 이번 전시에서 일어난 변화가 어디에서 연유하는지도 알 수 있게 한다. 그 핵심은 2년 전 존재했던 환영의 현전과 이번 전시에서 부재한 환영, 이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는 것과 동시에 그가 말하는 ‘본질’을 어떻게 읽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우선 환영의 문제에 집중해 보자. 이정동의 작업에서 개별성을 갖는 존재의 현전에 대한 환영의 효과는 이중의 의미로 읽혀진다. 하나는 이정동의 말을 곧이곧대로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번 전시와 연계해 이해하는 방식이다. 일단 환영을 환영일 뿐인 것으로 이해해 보자. 다시 말해, 그것은 본질이나 실재가 아닌 무엇이다. 형상성, 분명하고 뚜렷하며 서로 구분되어 나타나는 외관들, 수많은 관계와 변형, 변화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와 별개로 불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비본질적 환영이다. 이렇게 보면, 첫 개인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존재의 형상, 즉 사람들이 어떤 것을 존재로서 굳게 믿게 만드는 이 사람, 저 사람, 이 사물, 저 사물이 갖는 형태의 안정성과 고정성은 결국 환영에 불과한 것이다. 사물은 오히려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다. 컴퓨터 알고리즘에 의해 변형된 이미지들은 각각 사물의 이 덧없음의 상태와 잠재적 양태를 가리킨다. 우리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사물은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 있다는 기묘한 양자론적 상태 함수를 사물의 본질로 받아들일 수 있다. 마치 빛이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하며, 전자가 여기에 있거나 저기에 있을 수 있고, 동시에 이곳과 저곳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전자의 본질이듯이 말이다.


첫 개인전에서 이정동은 디지털과 가상의 시대를 살아가는 존재들이 갖는 상태 함수적 본질을 말하고자 했다. 여기서 환영은 환영일 따름이다. 존재와 형상의 환영은 무수한 변형과 그 층위들과 양태들 중 하나에 불과하며, 특히 우리에게 나타나는 사물의 가시적 외형의 환영은 인간적 지각 방식, 사고, 믿음 체계의 결과물일 뿐, 컴퓨터가 가능하게 하는 가상적 변형과 본질적 차이는 없다. 컴퓨터가 사물에 관한 정보를 처리하고 변형하는 알고리즘이 있다면, 인간에게도 그런 처리 메커니즘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어느 것의 우열이나 위계를 따질 문제가 아니며, 단지 하나의 원 정보(우주와 사물)를 처리하는 변형하는 서로 다른 방식과 처리 경로,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이것이 이정동의 첫 번째 작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중 하나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이미 디지털 시대의 중심에 서서 그로부터 우리의 실존이 어떻게 변모하는지를 몸소 체험하며 가상과 잠재성의 관점을 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왜 이번 전시에서 환영의 효과를 약화되어 나타나는지에 대해선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다소 심리학적인 관점과 나아가‘과정’ 개념과 그 필요충분조건에 대한 적극적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 이제 환영의 이중성 중 다른 하나를 말해보자. 한편으로는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는 가상의 존재 방식과 이것이나 저것으로 존재하는 존재의 현존 사이에서 그의 심리적 동인은 현존이 하나의 환영일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환영으로라도 현존을 붙잡아야 한다는 양가적 상태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음은 한편으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닐 수 있음이다. 덧없음과 비고정성은 쉽게 수긍되기보다 불안을 야기한다. 이 불안, 반대로 그가 찾아낸 사물의 본질에 대한 불완전한 승인은 가상공간으로 흩어져 버린 사물과 현존의 감각을 환영의 형태로라도 붙잡는 방식으로 이뤄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물의 굳건한 현존과 동일성은 곧 작가 자신, 즉 주체의 현존과 동일성에 대한 최소한의 보증이 되기 때문이다. 비록 가시적 외형을 본질로 승인하지는 않더라도 고스트와 같은 방식으로라도 있는 것은 ‘무엇’으로라도 있는 것이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그 고스트의 현전은 작가 자신에게나 보는 이로 하여금 모종의 안도감을 주며, 이해하기 힘든 그의 작품에 비교적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환영은 그것을 환영으로 인정하지 않을 때 문제를 만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작가 자신도 우리도 현존의 환영 속에 살아가야 하는 것을... 환영을 현존으로 믿고 살아가야 하는 것도 인간의 숙명이다. 가상 세계로 진입할 때 존재의 불안정성, 덧없음, 비고정성과 그로부터 떠오르는 ‘존재’에 대한 환영의 이중성, 이것은 첫 개인전에서 이정동의 언어가 가진 매력이기도 했다. 따라서 환영의 효과는 이것이 없다면 가상의 세계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되어 버릴 존재의 현존에 대한 최소한의 실존적 긍정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독법은 그가 왜 컴퓨터가 허용하는 최대치의 이미지 레이어를 만드는지, 왜 그가 컴퓨터 이미지를 현실의 드로잉으로 재연하는데 그토록 집요하고 엄청난 노동력을 투자하는지, 가상 이미지를 굳이 현실의 이미지와 매체의 물질성 안에 옮기려고 하는지의 이유를 알 수 있게 한다. 그가 변형 이미지 레이어를 컴퓨팅이 가능한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것은 반대로 생각하면 그가 컴퓨팅 그 이상의 것을 그가 존재(그것이 인간 주체건, 사물들이건)를 컴퓨팅과 가상 그 이상의 것으로, 예컨대 물질성과 창발의 논리를 따르는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많은 시간을 요하는 드로잉의 과정은 한편으로는 그 자신의 물질적 현존을 가상의 존재 방식과 동화시키는 행위이기도 했으며, 다른 한편 가상의 존재 방식과 현실적으로 육화된 존재 방식을 이중적으로 승인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물론 이 역시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변형은 단지 컴퓨팅의 한계일 뿐 변형 자체에 한계가 없음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다. 첫 개인전에서 이정동의 작업과 그의 인식은 이렇게 두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주며, 이는 작가의 인식이 존재와 과정의 두 본질, 현실과 가상의 두 양상 가운데서 세계와 자기 자신의 위치를 모두를 승인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읽혀진다. 그러나 이런 양가성은 한편으로는 모순을 야기한다.


첫 개인전을 이와 같이 읽을 수 있다면, 이제 이번 관훈 전시에서 사물과 형상이 약화되거나 사라진 것도 옳게 읽어낼 수 있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현실과 가상의 존재 방식 간의 모순과 충돌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낸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말하는 ‘본질’ 안에서 말이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이 종합의 길에 이르렀는지는 그가 통찰해 낸 ‘본질’이 무엇이었는지를 해명함으로써 분명해 질 것이다. 변증법적 종합에서 비본질적인 것들의 모순은 본질 안에서, 더 근원적인 질서 안에서 해소된다. 그는 이미 작가노트에서 그가 찾은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나는 사물을 볼 때 시간과 기억을 더해가며 현실과 가상의 눈으로 1년 이상 긴 시간을 이어서 보는 걸 좋아한다... 드로잉은 왼쪽이나 오른 쪽, 위나 아래로 움직이는 선의 경로에 의한 시간의 기억이다. 시작과 끝 진행되는 순서의 과정을 관찰할 수 있는 경로, 그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사물의 ‘그것’이다.(작가노트, 2018)


 


그가 말하는 본질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사물의 ‘그것’”이다. 작가가 그 사물의 본질을 단지 ‘그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본질은 분명한 윤곽을 갖고 있어서 이것이라거나 저것으로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개별적인 사물들을 아우르는, 실체로서의 영원불변하는 개념적 형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질로서 ‘그것’은 시간, 더 정확히 말해 ‘과정’그 자체이며, 있다면 과정으로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에 의해 변형된 무엇이건, 그 변형 레이어를 종합해 얻어낸 것이건, 이것들은 우리가 이것이나 저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이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본질로서 그 과정의 결과물이거나, 사유가 개념적 추상을 통해 포착할 수 있는 것들이다. ‘과정’을 본질로 승인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존재의 현존이나 형상과 같이 개별성을 갖는 것들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런 개별성은 시간과 과정이라는 본질 안에 있는 변형의 순간들, 어떤 단면들이나 결과물로서 족하며, 이는 현실의 사물들이나 우리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그는 존재의 환영에 더는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가상이건 현실이건, 객체적 사물이건 주체건 모두 본질인 ‘과정’ 안에 모순 없이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환영이 약화되거나 부재하게 된 것은 이런 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존재건 사물이건 어느 쪽의 환영이건 그것은 과정의 경로 안에 존재하는 변형의 한 측면이다. 과정 안에서 가상은 잠재적 다양체로 존재하며, 현실의 사물들은 과정의 무한한 경로들 중 어떤 경로의 현실화이며, 그저 안정과 평형의 상태로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이렇게 장기적으로 안정화된 무엇들, 외연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것들을 개체라고 부를 뿐이다. 그는 이제 과정 안으로 완전히 침잠했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비닐 드로잉의 배면에 회화적으로 처리한 면을 덧대는 방식으로 선보이고 있는데, 이런 처리를 한 이유로 좀 더 자기 자신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런 회화적 처리는 종전처럼 현존의 환영을 생산하기보다 드로잉에 깊이 차원을 더하는 효과로 나타날 뿐이다. 이는 필시 자기 자신의 존재마저 과정의 일부임을 용인한 결과일 것이다. 자신이 입던 셔츠를 잘라 드로잉의 컨셉과 동일한 방식으로 설치한 작업, 무수한 진동 패턴과 간섭 패턴으로 보이면서 아울러 잠재적 다양체를 연상시키는 중앙의 실 작업과 이를 반영하는 오목 거울 설치 작업도 그가 말하는 본질이 ‘과정’임을 확증하게 만든다.


이번 전시에서 백미는 단연 3층 전시관에 놓인 대형 드로잉 설치 작업 <파도>(2018).< 파도>는 그가 경험한 것, 그의 아이디어나 해석적 경험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넓게 개념 미술, 설치, 드로잉을 혼합한 것으로 경험, 아이디어, 효과 모두를 얻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작품은 드로잉이라는 작업 방식 덕분에 얻어지는 수행의 측면은 물론이고, 그 결과물로서 이미지, 그로부터 드러나는 지각적 효과, 설치가 주는 시간적 경험 방식, 이후 얻어지는 반성적 경험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작품에 그의 모든 것이 망라되어 응집되어 있다. 가히 <파도>는 ‘과정’론의 언어적 해석이다.


총 네 개의 비닐 드로잉과 이들 전부를 투과하여 벽에 투사되는 파도의 영상 이미지로 구성된 이 작품은 마치 관객을 그가 말하는 본질, 즉 과정 안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준다. 설치는 그 규모가 대변해 주듯 4년간의 작업 결과를 집약한 야심작이며, 과정을 사유하게 만들기보다 경험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네 레이어는 각각의 독립된 이미지로 읽히기보다 연속적인 과정, 일종의 변형의 경로 같은 것으로 읽혀야 한다. 각각의 레이어는 우리에게 가시적 사물로 나타나는 파도 이미지가 그처럼 가시화되는 과정 안의 분기점들, 즉 각각의 특이점들, 그 특이점들이 온갖 벡터 요소들을 구조화한 결과물을 시사한다.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시각언어는 벡터적(사선) 요소들의 일정한 패턴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그 자체로 잠재적 벡터장을 구조화하는 특이성의 기능을 시각적으로 예화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작가의 모든 작품은 소위 근대주의적 양식의 기저 구조인 그리드 체계와 그로부터 작동하는 연역적 닫힌 체계를 완전히 벗어나 있으며, 반면 가변성을 특징으로 하는 벡터 요소와 그 조합은 과정의 세계관을 시각언어의 차원에서 효과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그는 이미 직관적으로 그리드 분할 체계는 존재의 언어체계이며, 과정의 언어에는 적합하지 않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관객은 그의 어느 작품에 서건 무한히 지속되는 시각적 운동과 형태적 변위의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이 안에서 ‘무엇’이라는 존재의 환영을 붙잡으려는 욕망은 그야 말로 헛되고 덧없는 것이다.


이런 지각적 효과는 직접 설치 작품 안을 걸어 다니면 더 극대화된다. 관객은 각각의 층위로 분명하게 나뉘는 네 개의 레이어를 거시적으로 안정화된 것으로 볼 수 있음에도, 그 안을 직접 걷는 순간 시각적으로뿐만 아니라 지각적으로 그 또한 과정의 일부임을 곧바로 체감하게 된다. 다시 말해 네 레이어는 하나의 과정 안의 다른 위상들이라 말할 수도 있는데, 그 위상들 속을 걷는 순간 이 그의 시각언어는 우리를 과정으로 이끈다.


작가는 <파도>에 대해 “결국은 다 같다는 겁니다”(작가와의 인터뷰, 2018)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정확히 이해하지 않을 때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우리가 현실에서 접하는 파도의 영상 이미지 혹은 현실에서 접하는 이미지, 그것을 컴퓨터의 알고리즘에 의해 변형한 가상의 이미지들은 같은 것인가? ‘같다’는 말을 우리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첫째, 현실의 사물, 그 사물의 이미지, 가상의 이미지는 모두 어떤 궁극적 본질인 과정 안의 이질적 특이성들이나 이 이질성은 하나의 과정 안에서 연속적이어서 결국 하나의 과정으로서 같다. 하나의 현실적 사물은 이 과정 전체의 결과물이므로 과정이라는 본질 없이는 그처럼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같다. 둘째, 최근 과학계의 세계관적 전환이 채택하고 있는 홀로그라피holographic 관점(블랙홀 열역학이나 데이비드 봄의 양자역학적 세계관이 지지하는)에서 같다. 부분에 전체의 정보가 담겨 있다는 홀로그라피론 역시 과정론의 세계관에 다름 아니며,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전일적holistic ‘같음’을 말할 수 있다. 각각의 특이점으로 인해 구조화되는 벡터(물리적 세계에 존재하는 잠재적 힘들의 장으로서 벡터장이건, 이 벡터들의 시각적 은유로서 사선 벡터 자질들이건)들은 과정 안에서 전체의 정보를 담고 있으므로 전체와 같다. 결국 과정론에서 보면, 진정한 실재는 과정이며, 잠재적 다양체로서 가상은 현실의 무수한 변위들을 생산하는 기제이며, 모든 것들은 다양체가 현실화되는 과정의 경로와 형식에서 차이가 있을 뿐 과정에서 기인한다는 점에서 같다.


작가 이정동은 이번 전시를 통해 동시대의 과학, 사상, 문화 모두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대한 변화, 즉 존재에서 과정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그의 체험, 사유, 시각언어 모두에서 분명하게 예증해 내고 있다. 한명의 예술가로서 시대의 변화상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그의 어깨에 걸친 무게는 그토록 집요하고 묵직한 언어만큼 결코 가볍지 않으며, 그가 또 어떤 언어로 우리를 놀라게 할지 기대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