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전시 Current Exhibition

Journey into the Line
박영훈
Journey into the Line
장소
관훈갤러리 전관
날짜
2014.05.21 ~ 2014.06.01

픽셀의 변환 의지와 관계미학

 

박영훈의 이번 개인전의 주제는 《journey into the line》이다.  그것은 픽셀로부터 기인하는 격자무늬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무한한 여행이다. 즉 그것은 ‘픽셀→레이어→멀티 레이어’로 확산하는 이미지 밖으로의 여행임과 동시에
‘면→선→점’으로 환원하는 이미지의 안으로의 여행이기도 하다. 그의 최근 작업은 한마디로 이미지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관계의 커뮤니케이션, 즉 ‘관계의 비주얼커뮤니케이션 미학’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관계의 미학과 비주얼 시맨틱스

 

1999년 이래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업들에는 관계의 문제의식들이 언제나 내포되어 있었다. 자아와 타자, 주체와
사물, 사물과 사물(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보는 것과 아는 것, 이미지와 정보, 비언어와 언어 등 그의 작품들에는
대립의 극단을 화해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관계적 미학에 대한 관심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랑그와 빠롤, 언어와 소음,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에서 상호간 다른 언어들을 탐구하는 작업들(1999, 2000)에서도, 양이나 사람의 형상을 무한
복제시키며 원본과 가상을 탐구하는 작업들(2004)에서도, 실재계를 사실(fact)과 사물(object)의 관계항으로 바라보는
그의 작가노트(2000)에서도 이러한 관계의 미학은 여실히 나타난다.

 

 

그에게 관계미학이란 때로는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는 문’과 같은 작품을 통해 유희적 사유의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거나(1999), 때로는 예상 밖의 전시 디스플레이를 통해 작품이란 벽에 거는 것이라는 사유의 관성을 배반시키
거나(2007), 때로는 목욕통과 잡지무더기의 병치를 통해 사물들의 낯선 만남을 주선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은 분명코 ‘느닷없는 무엇’이다. 이러한 ‘느닷없음’은 작가 박영훈에게 있어, 언어의 질서적 세계관에 대한
불신이자 그것을 대체하는 이미지에 대한 무한 신뢰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이미지의 모호성을 언어
(혹은 텍스트)의 번안을 통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우리의 그간의 노력들을 일순간에 포기하도록 끊임없이 종용한다.
즉 언어가 아닌 이미지로 비주얼아트의 의미론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2007년 그의 전시 주제는《그래픽 의미론(graphic semantics)》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이미지에 대한
의미론을 ‘해석을 동반하는’ 언어학적 유산으로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지각에 호소하는’ 감각의 덩어리로 이해하려는
차원을 간파하게 된다. 이처럼 이미지를 이미지 자체로 이해하려는 ‘시각적 의미론(visual semantics)은 ‘언어적
의미론’ 이 과신하는 ‘이미지에 대한 언어의 번안 능력’을 별반 신뢰하지 않는다. 이미지를 ‘해석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무엇’으로 정초하고픈 까닭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마치 시각기호론자들이 이미지의 내용면과 표현면을 나누고 다시 표현면을 도상기호와 조형기호로
쪼개면서 시각기호의 자율성을 탐구했던 것처럼, 가장 기초적인 조형요소인 ‘점’으로부터 이미지 자체의 의미론을
탐구한다. 예를 들면, 그는 일련의 시리즈 작업(2004, 2007, 2009)에서 각기 크기가 미세하게 다른 점들을 병치시켜
가까이서 보면 인물의 형상이 해체되지만 멀리서 보면 그것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품들을 선보인 바 있다. 언어의
자음과 모음 그리고 주어, 목적어, 술어의 배열이 만들어내는 언어적 의미론을 각기 다른 점들의 배열을 통해서
시각적 의미론으로 실현시켜낸 이 작품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인식론마저 제기한다.

 

픽셀의 시각적 변환

 

언어적 의미로 해석되길 거부했던 ‘점(dot)’은 이번 전시에서 ‘픽셀(pixel)’로 대체된다. ‘점’이 아날로그 이미지의 최소
단위라고 한다면, 화소(畵素)로 번역되는 ‘픽셀’은 컴퓨터 디스플레이 등에서 볼 수 있는 디지털 이미지의 최소
단위(picture element)이다. 우리가 디지털 이미지들을 확대할 때, 그 경계선들은 마치 계단과 같은 사각형 픽셀들의
집적체들로 나타난다. 픽셀은 그런 차원에서 행과 열로 이루어진 이미지로 무한 확장 가능한 사각형의 ‘디지털 점
(digital dot)'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컴퓨터 내부에서 색의 정보를 가진 데이터, 즉 가상의 차원으로 존재한다.

 

 

흥미로운 것은 작가 박영훈이 이러한 픽셀을 자신의 최근 작업의 화두로 삼으면서, 그 조형적 실천을 디지털의
방식으로부터 아날로그의 것으로 변환시켜 내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디지털 값을 아날로그 신호로 변환, 출력하는
D/A변환을 실천하는 것처럼, 작가는 비물질적인 픽셀의 가상적 덩치를, 물리적 공간에서 실제로 키워내고 물질화해낸다.
그것은 프린팅한 픽셀 이미지를 리터칭하는 ‘사진↔회화’의 방식으로 또는 특수제작한 색아크릴판을 자르고 겹쳐내는
‘회화↔조각’의 방식으로 평면과 입체를 넘나들면서 실험된다.

 

 

이렇듯 픽셀의 시각적 변환을 아날로그의 장에서 실험하는 그의 작품은, 디지털이미지가 ‘픽셀→레이어→멀티
레이어’로 확장함으로써 가능해지듯이, 격자무늬로 표상되는 회화의 장안에서 다양한 색점들의 레이어를 만들어내면서
확장한다. 레이어들의 중첩과 같은 박영훈의 조형언어는 그가 지금껏 선보여 왔던 ‘만남이라는 관계미학’과 ‘비주얼
시맨틱스’의 최근 버전이라 할 수 있겠다.

 

 

생각해보자. 픽셀들이 겹쳐지는 레이어는 그 정도에 따라 자신의 고유 색점을 잃어가면서 불투명도(opacity)에
기여해나간다. 많이 겹치면 겹칠수록 자신의 색은 다른 색과 오버랩되면서 블랙(black)에 이르는 감도를 높여나간다.
작가는 이러한 픽셀의 겹침과 레이어의 형성을 ‘포장’(packing)이라는 은유를 통해서 이해한다. 그것은 물건을 싸는
포장지가 여러 겹 늘어날수록 포장의 결과물은 단단해지는 대신 애초의 물건은 보다 더 가려지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견해가 다른 이들이 모여 자신의 의견을 양보해가며 하나의 회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주체와 타자(혹은 사물) 사이의 오묘한 관계의 미학을 생산해낸다. 한편으로, 그것은 픽셀의 투명성(transparency)이
레이어의 불투명성(opacity)으로 오염되어가는 이 사회에 대한 풍자적 은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는 관계의 미학을 탐구하되, ‘가장 적게 말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는 픽셀의 시각적 변환이란 조형적
언어를 통해서 현실계를 만남의 장, 혹은 그것의 연속으로 보고자 한다. 달리 말해 그것은 일상적인 것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기 보다는 관계 자체를 그저 만남이 형성시키는 ‘이미지 덩어리’로 인식하고 그것을 제시하고자 하는 일종의
작가적 의지이다. 그러니까 그의 작품에는 확산의 의지와 환원의 의지가 교차하는 셈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작품에서,
구름, 바다, 사람, 나무, 건물과 같은 현실계의 ‘이미지 덩어리’는 픽셀의 크기가 과장되게 키워져 해상도가 떨어진
‘초점 없는 무엇’ 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승리의 V자를 그리는 손가락 모양은 더러는 토끼의 형상으로 더러는
빨래집게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이미지들을 ‘툭’ 하고 던져놓은 그의 조형어법 때문에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하다.

 

가구와의 만남과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흥미로운 것은 작가 박영훈에 의해서 격자의 그물 안에 느닷없이 혹은 탈맥락적으로 던져진 낯선 사물 혹은 ‘이미지
덩어리’가 스멀스멀 자라나 오묘하고도 매혹적인 ‘관계의 질서’를 자생적으로 만들어나간다는 사실이다. 아! 물론
의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결과는 박영훈이 치밀하게 계획한 것일 수도 있다. 특히 이번 개인전이 현대적
가구디자인 브랜드가 운영하는 갤러리 (gallery Herman Miller) 와 고가구와 현대미술을 함께 소개하는 갤러리
(CSY 갤러리) 두 곳에서 동시에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작가의 그러한 치밀한 연출의 계획성을 쉽게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이러한 피상적인 예견은 그의 진의와 어긋난 것일 수 있다. 애초에 그의 관심은 자신의 작품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관계의 미학을 실험할 수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탐색하는 동기 자체가 주요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가구 매장 디스플레이 안에 그의 작품은 ‘툭’하고 개입한다. 즉 이번 전시는 가구들을 자신의 작품을 배치하기
위한 배경으로 삼고자 이리저리 옮긴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이미 설치되어 있던 가구들의 맥락 안에 그의 작품이
개입한 것이다. 그것은 ‘느닷없는 던져짐’ 이며 탈맥락적인 가운데 시도된 ‘낯선 만남’ 그 자체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작가의 개입이 만들어내는 매혹적인 관계의 미학을 이번 전시를 통해서 목도한다. 아무런 관계가 없던
가구들과 그의 작품은 어느덧 대화를 나직이 시도하면서 픽셀의 레이어를 새로운 친구인 가구들에게 덧씌운다.
그런 차원에서 원래 그곳에 있던 가구들을 대화에 참여하는 인터뷰이(interviewee)라 지칭한다면, 전시가 끝나면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할 박영훈의 작품은 가히 대화를 주도했던 인터뷰어(interviewer)라 할 것이다.

 

 

이제 그의 작품들이 시도하는 비주얼커뮤니케이션이 또 어떤 인터뷰이를 만나 어떤 방식으로 지속될지는 작가만이
알 일이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들이 관계적 미학과 시각적 의미론으로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은 이번 전시에 이르기까지

 

그간의 작품들을 통해서 충분히 예견될 수 있지 않을까?